<기고> 내가 본 김용석 사장의 멋있는 착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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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성일 09-06-17 11:48본문
<기고> 내가 본 김용석 사장의 멋있는 착상
←글쓴이 윤경수 [북경자수(自修)대학교 명예교수.문학평론가.수필가]
김용석(68)은 20대에 보통고시에 합격한 수재이다. 1950년대 보통고시에 합격하면 공무원에 임명되었으나 후에 이 제도는 폐지되었다.
그는 성남에 살면서 중고등학교 교사로 28년간 근무하다가 퇴직하였다. 그는 교사로 재직 중 교사로서 남다른 지도력을 발휘했다. 그가 담임한 반은 다른 반에 비해서 학업성적이 뛰어났다. 그리고 그가 담당한 과목 또한 연합고시 성적이 다른 학교에 비해서 고득점을 받았다. 학교의 교직원들은 김 교사의 리더십을 부러워했다.
그 후에 여러 번 교장과 교감이 교체되었으나 임명되지 않았다. 그는 자기보다 젊고 후배가 교장이 되어 교사직을 사직한 것이 아닐까?
우리사회는 직업과 상관없는 소위 낙하산인사가 있어왔듯 사립 중고등학교 또한 실력과 지도력이 남다르게 뛰어나도 교장이 되는 것은 아니다. 김 교사가 1997년 IMF한파가 닥쳐올 때 교직을 퇴직을 한 것은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는 28년간 퇴직금과 저축한 돈으로 수정구청 맞은편에 교회 병원 등 30여 상점을 개업할 수 있게 5층 규모로 용인빌딩을 짓게 되니, 어려운 점이 많았을 것이다.
그는 소자본으로 빌딩을 짓기에는 태부족이었지만 여러 날 궁리 끝에 아이디어를 내어 기공을 했다는 것이다. 그는 건물을 올리면서 설계도를 설치하고 입주자를 모집하는 공고를 냈다고 한다. 이 사업추진은 누가 생각해도 무리였지만 차질 없이 진척되어 준공검사도 무사히 마쳤다는 것이다.
위치적으로 빌딩 뒤 구릉에는 아파트가 즐비하게 들어 서 있고, 횡단보다도 용일빌딩 앞으로 수정구청을 다니게 된다. 이 건물위치는 풍수지리학설의 입지조건과 인문지리학상으로 보면 남향이고, 겨울에 서북풍과 여름이 동남풍이 불어와도 장마가 닥쳐와도 잘 빠져나가는 내백호(內白虎) 지역이다.
수정구청 뒤에는 우백호(右白虎) 구릉지역이라 아파트들의 숲을 이루고 있다. 두 백호들은 완충역할을 하여 타 지역에 비해 약간 춥거나 덥지 않고 물난리도 격자 않는 천혜의 자연조건이다. 김 사장이 토지를 구입한 것은 자연지리적조건 때문이라 본다. 입주신청자들은 건물이 위치적으로 길지이고 명당자리임을 알고 영업하면 수입을 올릴 것이라 믿고 많은 사람들이 신청을 했던 것 같다.
김 사장은 인문지리학과 풍수지리학설을 아는 것으로 인해 토지를 사들여, 마침내는 고액의 임대료를 지불받아 명당자리에다 빌딩을 무난하게 지을 수 있었다. 그의 기발한 착상은 동료들이 그의 사업능력의 수환이 뛰어나고 멋있다고 그의 공로를 치하하는 목소리가 자자하다. 요즘 세계적 경제 한파로 인해 많은 빌딩들은 자영업자의 도산으로 비는 공간이 많다고 들었다, 그러나 용일빌딩은 자리가 좋고 사업능력이 뛰어난 관계로 잘 운용되고 있다.
그는 30여 상점을 잘 관리하여 재산을 증식하는데 수환 또한 남다르다. 지금은 창령공업고등학교 이사 겸 진해 세화여자고등학교(世和女子高等學校)이사장직에 있다. 그는 수도권에 대학교나 중고등학교를 인수할 학교가 있으면 기꺼이 투자하여 학교를 맡아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 소원이라고 한다. 지금은 교주가 되었으니, 소원을 이룬 것이다. 하기야 천하의 영재를 모아 가르치는 것은 천하의 즐거움이라고 맹자도 삼락(三樂) 중에 하나로 꼽았으니, 학교를 운영하는 것이 그의 꿈이라고 한다.
한국에는 입지전적인 인물과 자수성가로 성공한 사람도 많다. 그러나 김 사장은 흔하게 벼락부부가 된 정치권의 유착이 아닌 깨끗하게 돈을 모아 사장과 이사장직에 있다는데 의미가 남다르게 평가된다.
앞으로 그의 기발한 아이디어는 무슨 일을 또 할 것인가? 나이도 70줄에 가까우니, 이 두 곳만 잘 운영해도 사람들이 자수성가를 이루고 입지전적인 인물이라고 예우할 것이다, 그리고 그는 훗날 재산을 늘려서 사회에다 환원하겠다고 하는데, 그 때 가서 결정할 일이니, 두고 볼 일이다. 자손들에겐 살 만큼 재선도 물려주었으니, 자손들 또한 부모의 뜻을 따를 것이다.
그는 조상대대로 성남과 인연이 깊다. 오늘의 성남시 중원구 금광동(金光洞)은 그의 선조 음촌(陰村) 김약시(金若時 1335-1408)가 은거한 것으로 생겨난 이름이다. 음촌은 고려 말 직제학을 역임하고 두문동 72인중에 한분이다. 오늘에도 음촌(陰村)으로 인해 광산 김씨들이 성남에 많이 살고 있다.
김 사장은 성남과 조상 때부터 관계가 깊어 성남을 남보다 향토애로써 관심을 가지며 살아오고 있다. 그는 남에게 좋은 일을 해도 떠들썩하게 내세우지 않는다.
그는 지난날 어렵게 살아온 관계로 어려운 사람들을 남모르게 돕고 있다. 그리고 아는 사람이 찾아오면 우선 남한산성 아래 산나물로 유명한 음식점으로 데리고 가서 식사를 대접한다. 찾아오는 사람이 한 두 사람도 아닌데 대접하니, 그런 사람도 요즘 세상에 드물다.
김 사장은 찾아온 손님을 대접하는 것이 예의라고 성의 있게 맞이한다. 그는 각 성씨의 내력과 설화와 야담으로 이야기꽃으로 구연하면 시간가는 줄 모르게 보낸다. 김 사장은 양평지구 이외에 이천 지구의 토지도 좋은 길지를 소유하고 있는 관계로 지인들이 그를 우러르고 입지전적인 경제인으로 대한다.
용일빌딩은 종친이니 친지나 제자들의 연락처가 되어, 공자의 “덕불고(德不孤)는 필유인(必有隣)”(덕이 있는 사람은 외롭지 않고 반드시 이웃이 있다)라고 한 말을 떠올린다.
친지 중에는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에게 싼 값으로 토지를 매입하게 하여 중산층으로 살게 한 사람이 여럿이고, 이 사실이 알려져 그를 의리와 덕망 있는 사장으로 받들고 있다. 김 사장은 세속의 졸부들과는 달리 깨끗하게 벌어서 순수하게 사장과 이사장이 되었으니, 자수성가를 이룬 멋있는 입지전적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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