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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성남 종친회 영월 장릉 역사관광에 나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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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성일 10-11-23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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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성남 종친회 영월 장릉 역사관광에 나서다

093202_4189.jpg←글쓴이 윤경수 [북경자수(自修)대학교 명예교수.문학평론가.수필가.용인시민신문 시민기자]

성남종친회에서는 5년전에 강원도 영월에 매입한 고랭지에 가꾼 채소도 볼겸 5인의 회원이 승용차를 이용해 관광에 나섰다. 3시간만에 도착해 채소밭을 보니 경작자가 채소를 파종하지 않아 뺑대숲으로 뒤덮어져 있었다.

회원들은 실망하고 영월군 영월읍 염흥리 소재 조선6대 단종의 능인 장릉(莊陵)으로 향했다. 장릉은 세계문화유산이 등재되었다는 것과 사적196호로 지정된 것도 간판을 보고 알게 되었다. 단종역사관과 비문도 보고 난 후 단종릉을 참배하였다.

능은 양쪽 벼랑에 위치해 있지만 양지바른 곳이라 잔디가 아담하게 잘 가꿔져 있다. 조선초기의 문인석 망주석 장명등 상석의 석조물과 그 중 화재를 예방하기 위해 소화전이 갖추어진 것을 조선조 600년간 역대왕과 왕비의 능 42기 중 단종왕릉에서 처음으로 보았다. 종친회원들 간에는 단종(1441~1457)의 서거에 대해 의견이 교살(絞殺) 또는 사사(賜死)되었다는 등 의견이 각각 다르게 말을 한다. 교살되었다는 것은 민간에서 이르는 말이고 안내판에는 세조의 명으로 사사되었다고 되어 있다. 사람들은 두가지 내용으로 알고 있지만 왜곡된 실록의 기록이지만 단종이 자결했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세종대왕은『세종실록』에서 자신에 대해 사가들이 어떻게 기록된 것을 알기위해 보고자 했으나 거절당해 보지 못했다. 조선왕조실록은 그만큼 사실대로의 기록물이나, 물론 이사실은 성군 세종때의 일이고 세조때는 워낙 험악한 시대라 곧이곧대로 쓰지 않고 단종이 자결한 것으로 사실과 다르게 기록해 놓았다.

단종의 승하는 자결도 사사도 아니고 교살이 맞는다고 했다. 회원들은 어떻게 단종의 승하를 교살로 단정할 수 있느냐고 묻기에 금년에 조선왕조실록 역사인명 사전을 편찬하는데 참여하여 여러 가지 정황으로 알게 되었다고 했다. 단종은 1452년 5월 18일에 문종이 갑자기 승하하자 12살 나이로 임금으로 즉위하였다. 어린 나이로 즉위한 단종은 3년 2개월 재위 동안(1452~1455) 수럼청정을 할 만한 배경조차 없었다. 이 때를 틈타 수양대군은 1453년(단종1) 1월에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켜 반기를 둔 종친과 궁인 신하들을 유배시키고 대신들을 죽이자 단종은 왕위를 내놓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마침내 수양대군은 어린조카의 왕위를 찬탈하고 세조로 등극하여 단종을 교살케 하였다. 그런데『세조실록』세조3년(1457) 10월21일 조에는 자살한 것으로 기록해 놓았다.

장릉을 떠나면서 세조는 단종의 왕위를 찬탈할 것이 아니라 어린 조카의 정치에 대해 섭정을 하였으면 조선의 역사는 상황이 달라졌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세조는 주(周)나라의 주공(周公)이 어린 조카 성왕(成王)을 도와 주나라 왕실 800년의 기틀을 마련해놓은 것과 같이 섭정을 했어야 했다. 주공(周公)의 섭정으로 주나라의 감옥은 ‘40년이 비었다(囹虛四十年)’라고 할 정도로 이상적인 나라를 세웠다. 공자(孔子)도 주공의 정치를 사모하여 꿈에 주공을 자주 만났다는 것은 오늘에도 노인간에 회자되는 이야기이다.

세조의 왕위찬탈은 천륜과 인륜의 어긋나는 행위였으니 안타가운 일이다. 세조는 탐욕으로 왕위를 빼앗아 역사에 오점을 남겼기에 하는 말이다. 종친들은 단종(이홍위(李弘暐))이 영월로의 유배생활과 단종릉이 비운의 소년 임금 능답게 많은 우여곡절 끝에 조성된 내력을 인지하고 돌아본 후에 느낌이 밝지 않는 표정들이다. 특히 종친들은 안내문에 단종이 자신을 두견새로 비유하여 지은 자규시(子規詩)를 읽고 슬퍼한다. 단종의 피눈물을 흘리면서 지었다고 볼 수 있는 시구는 모든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게 하는 단종의 육신의 소리로써 빚은 시다.

“원통한 새 한 마리 궁중을 나오니/ 외로운 몸 그림자마저 짝 잃고 푸른 산을 헤매누나/밤은 오는데 잠들 수가 없고/ 해가 바뀌어도 한은 끝없어라/새벽산에 울음소리 끊어지고 달이 흰 빛을 잃어가네/피 흐르는 봄 골짜기에 떨어진 꽃만 붉겠구나/ 하늘은 귀먹어 하소연을 듣지 못하는데/ 서러운 이 몸의 귀만 어찌 이리 밝아지는가/”

필자는 혼자서 한시로 된 칠언율시(七言律詩)를 읊조리며 복받치는 감정을 가루지 못하고 울먹였다. 점심때가 되어 영월군 북면 문곡에서 용천수로 숭어 양어장을 차린 횟집에서 점심식사를 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로 담론하다가 2시가 지나 떠나 성남에 6시경에 도착하였다. 헤어지면서 오늘 관광은 역사를 배우는 현장이었다고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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