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보훈의 달을 보내는 우리의 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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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성일 12-06-13 14:02본문
호국보훈의 달을 보내는 우리의 자세
←수원보훈지청 호국보훈의 달 김철은 기고문
매해마다 오는 6월이다. 호국보훈의 달에 많은 행사와 기념식이 있는데, 너무 많은 행사와 기념식이 정례화되면서 본연의 뜻이 바랜 감도 없지 않아 안타깝다. 이런 우리의 상황을 보면, 나라를 위해서 단 하나뿐인 목숨을 바친 순국선열에 대한 감사의 마음의 환기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호국보훈의 달인 6월 행사 중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은 6․25전쟁과 관련된 기념식이다. 6․25전쟁은 우리 한국사에는 물론이고, 세계사적으로 큰 의미를 가진 사건이다. 그런데 한국전쟁의 역사적 사실에 관해서 과연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는가? 전쟁의 의미와 영향에 대해서 어떤 의견을 가지고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아직까지도 세계적으로 다양한 의견이 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기습공격으로 시작된 전쟁의 명칭은 다양하다. 남과 북이 서로 다르고, 중국과 미국도 서로 다르다. 6․25사변, 6․25전쟁, 조국해방전쟁, 조선전쟁, 항미원조전쟁, 한국전쟁 등등. 이렇게 다종다양한 명칭은 바로 6․25전쟁을 다양한 관점에서 보고 있고, 한국전쟁에 대한 성격과 의미에 대한 의견이 존재함을 알게 해준다. 한국전쟁에 대한 오해와 널리 알려지지 않은 사실, 의도적으로 왜곡된 시각이 만연해 있는 이유 중 하나가 이것이다.
한국전쟁에 대한 가장 심각한 왜곡은 바로 전쟁의 시작이다. 한국 전쟁은 김일성의 의지로 발발했으며, 구 소련 스탈린과 중국 마오쩌둥의 지원을 약속 받고 일으킨 남침이다. 소련 공산당의 후르쵸프 전서기장은 회고록에서 한국 전쟁은 김일성의 계획과 스탈린의 승인으로 시작되었다는 점을 밝혔으며, 중국에서도 1997년에 한국 전쟁의 기록을 남한의 북침에서 북한의 남침으로 수정하는 역사교과서 개정을 하였다. 그리고 소련 붕괴 후 공개된 구소련의 비밀문서에서 스탈린은 김일성의 한국전쟁 시작요청을 48번 거절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김일성은 전쟁에 적극적이었으며, 오히려 소련의 스탈린이 전쟁에 소극적이었다. 전쟁광 김일성의 판단으로 수백만의 인명이 희생되었으며 이것의 일차적 책임은 북에 있다는 것은 명확하다.
우리는 위 사실에 기초해서 한국전쟁을 보는 시각을 조정해야 한다. 일제강점기 이후 독립한 우리나라는 세계사적 조류에 휩쓸려 양자택일을 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당시 남과 북은 각각 자유민주주의와 사회주의 체제를 선택한 상황이었다. 북한은 우리가 선택한 정체를 부정하고, 대화와 협상을 통한 해결책을 찾기 보다는 무력으로, 강력한 강대국인 소련과 중국의 지원을 업고, 우리가 선택한 길을 부정한 것이었다.
그 후 서로 다른 길을 선택한 남과 북은 60년이 지난 지금 어느 곳이 현명한 판단을 했는가는 이제는 자명한 사실이 되었다. 북은 국민들의 최소한의 기본적인 의식주조차도 보장하지 못해서 수백 만명의 아사자를 발생시킨 최빈국이 되었으며, 권력의 정당성은 이미 상실하고 무력을 기반으로 독재를 하는 세계적으로 민주주의와 가장 거리가 먼 독재국가가 되었다. 우리는 단시간만에 산업화에 성공한 후, 민주화까지 이루어낸 세계사에 길이 남을 업적을 가진 자유민주국가가 되었다.
이런 성공을 위해서 많은 피와 땀이 있었는데, 이 모든 것의 바탕은 한국전쟁에서 피를 흘린 순국선열들의 희생이 기본이 되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런 거대한 성공은 많은 외국인에게 감명을 주고 있는 반면에, 신세대에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실정이다. 우리나라에 대한 자긍심을 가져야 하고 우리는 그만한 자격을 갖추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e더 쿤 과제가 남았다. 앞으로 당당하게 선진국 대열에 진입하기 위한 항대한 여정은 이미 시작되었고, 여행의 처음에 초심을 되새기면서, 순국선열에 감사하고 또 감사하는 6월이 되길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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