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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상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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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성일 09-08-10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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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상진 이야기

4388.jpg서울대 의대 출신, 대한의사협회 회장, 국회의원 재선…. 한나라당 신상진 의원의 대표 이력이다.

누가 봐도 엘리트적 이력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극도의 가난과 사회적 불만이 점철된 어린 시절을 거쳤고, 대학 진학 후에는 체재 변혁을 꿈꾸는 운동권에 투신했고, 의사로 전업한 뒤 의학 분업 관련 대정부 투쟁을 이끄는 등 순탄치 못한, 아니 정확히 말하면 굴곡 많은 인생을 걸어왔다.

그렇기에 신 의원의 사진첩에는 그 ‘굴곡 많은 삶’을 보여주는 사진들로 가득 차 있었고, 마치 한편의 시대드라마를 보는 듯했다.

1956년 6월 28일, 신 의원은 서울 마포구 공덕동에서 세상의 빛을 봤다. 앞서 밝혔지만 어린 시절은 가난의 연속이었다.

신 의원은 “당시 아버지와 어머니는 각각 보일러공과 미싱사로 일을 했다. 두분 다 생산현장에서 노동자로 고생이 많았다”며 “그래서 다 쓰러져가는 판자집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말했다. 초등학교 시절에도 가난은 계속됐다. 그 당시 아이가 셋이면 셋방을 얻기 힘든 탓에 신 의원 부모가 ‘애가 둘이다’고 거짓말로 둘러댄 적도 있었다고 한다.

신 의원은 초등학교에 입학한 뒤 소위 ‘불량소년’들과 어울렸다. 그러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싸움하는 것을 관뒀고, 서울 단국중학교에 입학하고 나선 불량서클 친구들과의 교제도 완전히 끊었다. 이후로는 공부에 매진하는 모범생 생활을 이어갔다. 중학교 2학년 들어 중학교 배정을 재조정해 서울 독산동 강서중학교(현 세일중학교)로 옮긴 후에도 비교적 평이한 사춘기를 보냈다. 당시 그의 학업을 방해했던 것은 단 하나, (부모님이 처음으로 구입한) 텔레비전이었다고.

용산고등학교에 입학한 뒤 골수염으로 병원 신세를 져야만 했다. 이는 장래 꿈을 판사에서 의사로 바꾼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이후 재수까지 하는 우여곡절 끝에 1977년 자신이 원하던 서울대 의대에 입학했지만 파란만장한 삶은 그때부터 본격화됐다.

대학교 재학 시절, 신 의원은 의과 공부는 뒤로한 채 노동운동에 매진했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고 야학학교 교사 일에 매진하다 갑작스레 ‘노동 운동가’로 변신했다. 그러다 구속돼 감방에서 갇혔고, 출소 후 잠시 조그만 무역회사에서 취직해 일하다 성남 공단으로 노동운동의 불을 지피러 들어갔다.

그때(성남서 노동운동 할 때) 지금의 아내를 만나 동거를 했고, 마침내 결혼식을 올렸다. 수배 중인 상태라서 ‘조촐하게’ 진행된 결혼식이 끝난 후 무전여행 같은 신혼여행을 다녀왔다고. 이후로도 궁핍한 생활은 이어졌다.

‘먹고 사는 일’을 해결하기 위해 참기름 장사 등을 했지만 신통치 않았다. 그래서 찾은 돌파구는 ‘학교 복학’이었다. 결국 학교 공부를 마치고 졸업해 성남 인근에 병원을 냈다. 그렇게 해서 경제적인 어려움은 해결한 뒤에 자신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사회운동을 시작했다. 무료 의료봉사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활동은 장차 그가 국회에 입성하는데 큰 디딤돌이 됐다.

그의 현란한 말솜씨에 두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찢어지게 가난한 시절을 보냈고, 우여곡절 끝에 서울대 의대에 진학했다.

‘의사들의 반란’을 일으키며 ‘도망자’ 신세로 전락하기도 했던 신상진 한나라당 의원(54). 그와의 인터뷰는 모처럼 만의 유쾌, 상쾌, 통쾌한 인터뷰였다.

미디어법 통과 문제로 여야가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인터뷰가 진행됐지만, 어떤 질문에도 막힘없는 대답과 거침없는 태도로 기자를 ‘울고 웃게’ 만들었다.

스스럼없이 “복잡한 인생을 살아왔다”고 말하는 신 의원의 인생사는 참으로 우여곡절이 많았다. ’새옷’ 입어 본 적 없는 가난한 어린시절…소풍 못가 하루종일 울기도 초반엔 어린 시절 얘기로 분위기를 띄웠다. 어느 것 하나 내세울 것 없었던 신상진 의원은 가난으로 인해 ‘무료 유치원’을 다니는 등 역경의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돈이 없어 소풍을 가지 못할 뻔 했을 정도로 어려운 살림이었다. “소풍을 가려면 음식 등을 싸야했는데 그럴 형편이 안됐어요. 그래서 집 앞에서 하루 종일 울었습니다. 결국 옆집 친구에게 끼어서 갔죠.” 8남매의 장남이자 맏며느리로 시부모, 시누이, 시동생까지 생계를 챙겨야 했던 부모님으로선 소풍을 보내는 것조차 힘에 부쳤다. “대가족 생활비를 책임지셨던 부모님은 밥을 제때 챙겨 드시지 못했어요. 아버지는 식사를 하지 않고선 일부러 식사를 했다고 거짓말을 하셨을 정도였습니다.

어머니도 마찬가지예요.” 밥조차 챙겨먹기 힘들었던 신 의원은 어린 시절 추억을 떠올릴 때마다 가슴에 응어리가 질 정도다. “새 옷을 입어보지도 못했습니다. 늘 다 떨어진 옷만 입었는데요, 한 번은 유치원을 가는데 헌옷을 챙겨주시며 ‘아껴 입어라’라는 어머니와 실랑이를 벌이다 유치원을 가지 않고, 집 앞에서 울기도 했습니다.”

‘촌지’ 때문에 사회적 불만…공부 못하는 학생은 ‘올 수’ 나오기도 하지만 찢어지게 가난한 환경에서도 학교 공부에는 소홀하지 않았다. 부모님의 교육열이 누구보다 높았기 때문이다.

“돈이 없어도 학습지를 사주셨다”면서 지금의 위치에까지 올 수 있었던 것도 부모님 덕분이라 말하는 신 의원. 하지만 학창시절 역시 매 순간 가난이 고비였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촌지’의 힘을 알게 됐습니다. 방학 때 성적표가 나오면 저보다 공부를 못하는 동창은 ‘올 수’였고, 저는 ‘우’와 ‘미’가 섞인 성적이 나왔기 때문이죠. 이 때 ‘세상이 불공평하다’는 등 여러 가지 사회적 불만이 생겼죠. 담임선생님조차 신뢰할 수 없었으니까요.” 신 의원의 암흑기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부모님이 아기옷을 만들어 ‘동대문 시장’에서 옷! 장사를 시작한 후 밤늦게 들어오는 경우가 잦아지자 사회적 불만이 많았던 그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동네 불량배들과 함께 생활하며 본격적으로 ‘조직사회’에 몸담기 시작했다. 불량조직 몸 담아 싸움기술 익힌 신상진 의원…"필살기는 박치기였다"

“초등학교 때부터 소위 말하는 일진, 이른바 불량 깡패조직에 몸담았죠. 고등학교 선배들과도 연계되어 있어,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조직과 어울리지 않으려고 집에 있으면 집 앞 창밖에서 휘파람을 불거나 다음날 교실에 찾아와 마구 때리기도 했죠.

특히 부모님께 말씀드리면 사건이 커질까봐 혼자서 끙끙 앓았죠. 참으로 고통스러운 조직생활이었습니다.(웃음)” 이쯤 되면 조직생활에 관한 에피소드가 빠질 수 없다. 신 의원은 알아주는 ‘싸움꾼’이었다. 맞으면서 ‘맷집’도 키웠고, 태권도까지 겸비한 탓에 먼저 싸움을 거는 일이 자주 발생했다. 대신 버르장머리 없거나, 잘난 척, 힘없는 아이를 괴롭히는 애들에게만 싸움을 거는 그만의 철칙이 있었다. 당시, 그의 필살기는 박치기. 유명 프로레슬링 선수였던 김일 선수를 좋아해 ‘박치기 연습’을 많이 했다고 한다.

“모래주머니를 놓고 이마에 피가 나도록 박치기 연습을 했죠. 헤딩을 한 번 날리면 싸움이 끝났을 정도였으니까요. 지금 생각해 보니 머리가 없는 것도 그 때의 후유증인 듯 하네요.(웃음)”

학창시절 ’골칫덩어리’…"육성회비 제때 내지 못해 따귀맞았다" 신 의원은 학교 내에서 골칫거리였다. 소위 불량배들과 어울리면 공부에 소홀하게 마련이지만 신 의원은 싸움도 잘 하고 공부도 잘했기 때문이다. 담임선생님조차 신 의원 앞에서 두 손 두 발을 다 들었을 정도다.

하지만 다행히 초등학교가 끝나 갈 무렵 조직의 우두머리였던 학교 선배가 중학교로 진학하면서 동네 불량서클과 거리를 두게 됐다. “이후로 지금까지 싸움을 한 번도 안했어요. 철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웃음) 그래도 친구들이랑 노는 재미에 푹 빠졌죠. 학교 수업을 마친 후 친구들끼리 오류동에서 영등포역까지 달리기를 하고 그랬으니까요.”

그러나 신 의원은 중학교 시절 또다시 ‘가난’으로 인해 억울함(?)을 당해야 했다. 밀린 육성회비를 제때 제출하지! 못해 선생님께 따귀를 맞았던 것. 육성회비를 안내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돈이 없어서 약속을 지킬 수 없었다고 한다.

그 당시 “선생님이 어떻게 저럴 수가 있나”라는 생각도 들었다고 말한다. ’골수염’ 앓고 1년간 학업 중단…책 많이 읽은 탓에 ’애늙이’ 별명얻기도 특히 신 의원은 중학교 2학년 때 스케이트를 타다 다쳐 골수염까지 앓았다.

중학교 3학년까지 1년 넘게 만성 골수염을 모르고 지내다 용산고등학교에 합격한 뒤에야 병을 알고 휴학을 했다. 이 때문에 6개월 동안 입원했고, 실의에 빠져 지낼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 담당 의사는 “몇 년 늦는 건 문제가 아니다. 세계 유명한 사람들도 많다. 처칠은 삼수를 했다”며 신 의원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줬다. 게다가 장편소설, 철학, 종교 책 등을 접하면서 무료한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학교를 복학 한 뒤 한 동안 목발을 짚고 다녔어요. 때문에 교련·체육시간에는 교실에 홀로 남아서 ‘반 지킴이’를 했죠. 그리고 병원에 입원하면서 많은 책을 읽은 탓에 학교 내에서는 ‘애늙은이’로 통했습니다. 물론 나이도 한 살 많긴 했지만요….” 그렇다면 신 의원이 서울대 의대를 지망한!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병원 신세를 질 당시 좋은 의사 선생님도 있었지만 , 대부분의 의사들이 권위적이고 불친절한 모습을 보며 ‘좋은 의사가 되어야 겠다’, ‘남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있는 직업은 바로 의사’라는 생각을 했다.

서울대 의대 원서 때문에 선생님과 실랑이…"100수까지 하겠다" “사립대 의대는 학비가 너무 비싸 무조건 서울대 의대를 가야 된다는 생각을 했죠. 그런데 성적이 되지 않아 담임선생님이 원서를 써주지 않더군요. 그래서 재수를 하겠다고 말했는데 돌아오는 대답은 ‘(재수하면) 성적이 더 나오지 않는다’였습니다. 지지 않고 ‘그러면 삼수하겠다’고 답했더니 ‘더 성적이 나오지 않는다’고 우기시더군요.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100수하겠다고 말했더니 원서 마지막 날에야 ‘내가 졌다’며 원서를 써주더군요.

결국 떨어졌습니다만…(웃음) 그래도 재수한 끝에 장학생으로 입학했습니다.” 서울대 의대에 입학한 신 의원은 꿈같은 대학 시절을 맛보기도 전에 야학교사로 활동하게 됐다. 신 의원은 이에 관한 일화를 털어놓았다. “합격하고 다음날 고등학교 동창을 만나게 됐어요. 그 친구가 저를 만나더니 ‘심훈의 상록수 알지. 거기에 야간학교 나오잖아. 야간학교 교사를 하지 않겠느냐’고 건의해 당장 승낙을 했습니다. 초등학교를 중퇴하고 공장에 다니는 친구들을 가르쳤죠. 그런데 운동권과 연관되어 있었던 게 문제였습니다.” 운동권에 관심을 두지 않았던 신 의원. 학교 선배들이 신 의원을 운동권에 끌어들이기 위해 설득을 거듭했지만 그의 마음을 돌릴 수는 없었다.

“가난하더라도 착하고 열심히 살면 된다”는 일념에서였다. 그러나 1년 뒤 운동권에 뛰어들 수밖에 없었던 일이 발생했다고 한다. 억울한 죽음 보고 ’운동권’ 생활 시작…조사 받던 중 어머니 돌아가시기도 “당시 어머니가 가출하고 아버지는 폐결핵 말기인데다 동생 3명을 둔 17살 학생이 있었습니다. 초등학교를 중퇴하고 낮에는 공장, 밤에는 야학을 하며 집안 살림을 도맡았던 학생이었죠. 그런데 과천 정부종합청사가 공사할 때 그 근방 컨테이너 박스에서 자다가 질식사했어요.

너무나도 열심히 살아온 제자가 허무하게 죽는 것을 본뒤 사회에 눈을 뜨게 됐어요. 이 사건을 겪고 운동권에 뛰어들게 되었죠.”! 선배들의 끊임없는 권유에도 흔들리지 않았던 마음이 한 소년의 죽음으로 움직였다. 사회 운동가로 변모한 신 의원은 ‘평등사회’를 만들겠다는 각오로 학교 공부에서 손을 놓고 의과대학생 데모를 주도했다.

신 의원은 의과대학 본과 2년을 마친 뒤 휴학계를 내고 8개월 동안 인천 공장 현장을 다니다가 다시 복학을 했지만, 1982년 노동운동으로 인해 20일간 조사를 받고, 고문도 당했다. 특히 신 의원으로서는 평생 잊을 수 없는 사건이 하나 발생한다. “조사를 받으러 갈 때 어머니가 쓰러졌습니다.

평소 고혈압을 앓고 계시는데 병원에도 안가셨죠. 친척들을 불러 가까운 병원에 어머니를 모셔놓고 조사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1주일정도 지났을 때 어머니가 위독하시다는 말을 듣고 조사부 차를 타고 집에 갔었죠. 집에 가보니 장의사가 와 있었고, 어머니는 이미 돌아가신 상태였어요. 장례를 치르고 조사를 받은 뒤 구속됐어요. 몇 년 후 아버지 역시 위암으로 병중에 계셨는데 잠시 운동권 친구들과 회합을 하러 간 사이 아버지가 돌아가셨죠. 두 분 다 임종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제가 불효자죠….” 여전히 그의 음성엔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이 묻어났다. 어찌할 수 없는 슬픔과 안타까움이 가슴을 울컥하게 만들었다. 범죄자! 가 된 청년 신 의원, 그는 구속된 이후 1년을 독방에서 생활했다. 하지만 독방에서 17일 동안 단식운동을 하는가 하면 독방에 있는 시국사범들과 연락을 취해 데모를 하는 등 옥중 투쟁의 전면에 나섰다. 그 당시 생활했던 시국사범들 중 김근태 민주당 고문 등 민주당, 한나라당 운동권 출신들이 수두룩하다.

노동운동 확산 위한 낯선 땅 ’성남’ 생활…"아내 만나, 동거시작했다" 그는 출소 한 뒤 운동권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조그마한 무역회사를 다니다 성남 출신인 한 야학생을 만났다. 인천에는 노동운동이 빈번히 발생했던 당시 성남에는 노동운동이 전혀 없다는 말을 듣고 성남 공장을 다니며 노동운동을 시작했다. 지금의 아내도 그 때 만났다. “아내는 야학교사 출신이었죠. 대학생 신분으로 야학 교사를 하다 학교를 중퇴하고 구로공단에 출근하고 있었어요. 우연히 친구와 함께 만나 민속주점 같은 곳에서 만나 많은 대화를 하다 보니 공통점이 많더라고요.

그러다 두 달에 한 번씩 만나게 됐고, 지금의 집사람이 성남으로 와서 저와 함께 노동운동을 했죠. 이때부터 동거를 시작했습니다.(웃음) 1987년 수배가 내려질 때 결혼식 치뤄 수배 중인 상태라 가족, 친한 친구 몇 사람만 참석한 상태에서 비밀리에 결혼식을 올렸어요.” 잊지 못할 신혼여행…"공중전화로 숙박비 절반으로 깎기도" 신 의원은 결혼식을 올린 뒤 신혼여행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동거를 하던 이들은 같이 살던 단칸방에 왔지만 많이 허전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날 밤 훌쩍 신혼여행을 떠났다고. “막차를 타고 속초로 향했죠. 결혼식 하객이 워낙 적다 보니 축의금도 별로 없어, 무작정 설악산 인근 A여관을 갔습니다. 그 다음날 묵을 곳을 찾다보니 유스호스텔이 보이더라고요. 어떤 곳인지를 몰라 비쌀까봐 공중전화로 가격을 물어봤어요.(웃음) 사람이 없는 평일이라 요금을 절반으로 깎아서 들어갔는데 그 넓은 공간에 저와 아내, 단둘이서 지낸 호사스러운 날이었습니다.” 결혼을 한 이후 먹고 살 일이 필요했던 신 의원은 참기름 장사를 한 사연도 털어놨다.“제가 대학시절 어머니가 화곡동에서 참기름 장사를 하셨습니다. 참깨, 박카스 병에 참기름을 넣어서 시장 구석에서 파셨죠. 노점상을 하시다보니 단속 당하면 참기름을 들고 뒷골목 가서 숨는 일이 비일비재했어요. 그 때 생각이 문득 들어 참! 기름 장사를 하게 됐어요. 8개월 동안 참기름을 100% 직접 다 짜서 친척, 친구들에게 팔았어요. 그런데 교통비 등을 제외하면 남은 게 없더군요. 그래서 8년 만에 의대에 복학했습니다.”

먹고 살고 위해 의과대학 졸업…외국인 노동자 위해 일요일도 진료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던 차에 남동생이 직접 학교에 찾아가 시국사건으로 제적당했던 사람들은 학비를 내지 않고 복학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한다.

복학한 신 의원은 ‘노동운동에 대한 마음이 변질될까봐’ 전문의 과정을 밟지 않고 의과대학만 졸업했다. 그 후 바로 성남 인근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 가정집 2층을 빌려 병원을 차렸다고 한다. “노동운동을 한 탓에 병원 진료실에서 저를 알아보는 친구들도 있었습니다.

심지어 ‘언제 의과대학에 들어가서 의사가 됐냐’고 물어보는 이들도 적잖았죠. 그래서 과거를 털어놓았고, 국내에 외국인 노동자들이 들어오기 시작하고부터는 그들을 위한 진료도 했습니다. 외국인 노동자를 진료해주는 병원이 없어, 무료진료를 하기도 했죠. 의정부에서까지 오더라고요. 또한 가난한 사람들이 중증환가 많아 점심시간 등을 활용해 왕진도 갔었습니다.”

신 의원의 들려준 병원 시절 에피소드 하나. 병원 개업했을 때 병원에 왔던 엄마와 여자아이가 있었다. 아버지는 만성신부전으로 혈액 투석을 받아 노동력이 없었다. 다행이 어머니는 공장을 다녔고 아이가 아프면 신 의원의 병원을 항상 찾아왔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 어머니 대신 아버지와 함께 아이가 병원을 찾아왔던 것이다. 어머니가 가출을 했고, 아버지와 단둘이 살고 있어, ‘도와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무료 진료는 물론 용돈까지 전해 주기도 했다. 이 때문에 결손 가정 아이들과 자매결연을 맺었고 아이들을 2~3명을 돌봐주는 운동본부를 만드는 등 어린 시절 꿈꿨던 ‘가난한 아이들을 위해’ 봉사하는 꿈을 이뤘다. 의약 분업 선봉자에 선 신상진 의원…"회유·협박 있었다" 또 신 의원은 대한의사협회 회장, 의권쟁취투쟁위원회 위원장직을 맡았다. 당시 의약 분업 시행 두 달을 남겨놓고 정부와의 투쟁을 시작했다.

전국 의사들에게 의약 분업에 대한 의견을 종합하기 위해 찬반 투표를 실시하기! 도 했다고. “95%가 의약 분업에 반대했습니다. 진정성을 보이기 위해 전국 에 있는 모든 의사들이 면허를 반납하고 강경 투쟁에 돌입했었죠. 이른바 총 파업을 실시했었죠. 그 때 대통령을 빼고 한화갑 민주당 대표 등 정치권 인사 다수를 만났었습니다. 그러나 의사들이 총파업하는 등 이에 대한 대책이나 대처가 안일한 모습을 보고 실망을 많이 했습니다.

오히려 회유와 협박만 하려고 했었어요.” ‘의약분업’을 놓고 정부와 투쟁을 벌였던 신 의원은 정부에 항복하지 않고 삭발을 감행하는 등 강경한 입장을 고수했다. 결국 수배당기도 했다.“파업투쟁을 끝나면서 당장 수사가 들어왔습니다. 내가 출두 거부하고 종적을 감췄죠. 아무것도 해결된 것이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또 투쟁지도부를 유지하기 위해 피신을 했고, 숨어서 진두지휘했습니다. 한 달 반 정도 수배가 되면서 이때부터 유명해졌죠.(웃음) 한 번은 의사집회 당시 녹음테이프로 투쟁연설을 벌였을 때 경찰들은 ‘어디서 나는 목소리냐’며 저를 쫓으려고 했었죠.”

’신창원과 도주 수법(?)’과 비슷한 도망자 전락…"대포폰 3개에 있었다" 도망자 신세로 전락한 신 의원. ‘신창원과 도주 수법이 비슷하다’, ‘홍길동 신상진’이라는 온갖 수식어(?)를 남기며 전국방방곡곡을 다니며 외로운 시간을 보내야했다. 그런데 그 당시 비하인드 스토리가 숨어 있었다.

“한 친구는 카드, 다른 후배는 차를 빌려주더군요. 검찰에서는 저를 찾으려고 했고, 한 번은 ‘신상진 핸드폰 10개 가지고 다닌다’고 파악했던 것 같습니다.

저는 정작 대포폰 등 총 3개만 가지고 다녔어요. 카드로 삭 긁어서….(웃음) 또 위치추적까지 되는 걸 알았어요. 서울은 반경 600m, 시골은 6km까지 파악이 된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전화통화 간단히 하고 전원을 꺼버리고 다른 곳으로 이동했죠. 그러나 핸드폰이 안 터지는 곳도 있었습니다. 그럴 때는 위험을 무릅쓰고 공중전화 박스 앞에 차를 세우고 필요한 곳에 전화를 걸어 몇 마디만 하고 전화를 걸고 황급히 도망갔죠. 친한 사람에게 전화를 걸면 경찰에서는 그 사람들에게 ‘신상진 맞지?’라며 추궁했었습니다.” 검거될 당시 ’영화’ 한 장면 찍었다…쇠파이프로 유리창 깨기도 ‘도망자’ 생활도 영원히 지속될 수 없었던 것일까. 신 의원은 결국 오랜 도피생활 끝에 서울 한복판에서 잡히고 말았다. 차량 번호를 추적했고, 발신지가 서울 삼성동으로 가까이 오자, 검찰에서 며칠 동안 잠복 끝에 신 의원을 잡을 수 있었다 “잡히는 당시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듯했습니다. 쇠파이프로 유리창을 내리치며 도망을 가지 못하게 하더군요. 그래도 저는 도망을 갔죠. 골목길로 도망가다가 다른 차가 사고가 났었는, 계속 달렸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골목으로 들어가 더 이상 도망갈 수 없었고, 검찰에서도 제 차를 박아버리더군요. 사람들의 시선을 주목시키기 위한 수사기법이었던 거죠.”

의사회 ’영웅’으로 탄생…가난한 사람들 위한 고충 상담은 계속됐다 이 사건을 계기로 신 의원을 의사회에서 ‘영웅’이 되었다. 심지어 간선제였던 의협회장 선거가 직선제로 바뀌어야 된다는 목소리가 들끓었고, ‘직선제로 바뀌면 신상진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도 흘러나왔다.

이 때문일까. 신 의원은 직선제로 바뀌면서 75%의 지지율을 받고 의협회장에 당선되기도 했다. 특히 신 의원을 모르면 ‘간첩’이라는 말도 나온다.

신 의원은 의협회장 직을 끝내고 조그마한 병원으로 다시 돌아갔다. 그런데 한나라당 A씨로부터 정치입문 제의를 받았고, 고민에 고민을 한 끝에 결국 출마를 선언하게 됐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신 의원은 국회의원이 되기도 했지만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앞으로도 계속 봉사할 계획이라고 한다. 어린 시절 집안에 의사 하나 없어 막막한 시절을 떠올린 신 의원은 이들에게 똑같은 아픔을 전해주고 싶지 않다는 것. “동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직접 병원을 연결해주고 있습니다.

내 편지 하면서 모든 의사들이 도움을 많이 주니까요. 아니면 직접 전화를 걸어 ‘우리 동네 분이니 잘 부탁한다’고 전화 한통 해줘요. 전화 한통에 불과하지만 이들에게는 큰 도움이 될 수 있으니까요.”

자료제공 : <사진=김용덕 기자> [스포츠서울닷컴 정치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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