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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흥도 칼럼] 김정일만 모르는 “스탈린 격하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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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성일 10-06-15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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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흥도 칼럼] 김정일만 모르는 “스탈린 격하운동”

173042_222.jpg위대한 사회주의 건설자. 민족해방투쟁의 영웅, 인간이 생각해낼수 있는 최고의 형용사로 찬양됐고, 찬가로서 숭배케했던 스탈린이 죽은 것은 1953년 3월 5일이다.

시쵸프 스탈린이 사망한 후 3년 후인 1956년 2월 제20차 전당 대회에서 흐루시쵸프는 스탈린의 죄상을 낱낱이 고발하는 장시간의 연설을 했다. 물론 그 이전에도 프라우다지는 “의사들의 음모”가 전혀 있지도 않았던 일임을 발표했지만, 이 사실은 극히 일부에 불과했으며 흐루시쵸프는 스탈린의 숙청의 희생자가 된 많은 사람들이 결백함을 인정했다. 흐루시쵸프의 연설 내용은 결코 신문에는 발표되지 않았으나 꼬리에 꼬리를 물고 퍼져 나갔다.

1961년, 레닌과 나란히 대영묘에 묻혔던 스탈린의 시체는 크렘린 궁내의 지하로 이장되었다. 이에 따라 탈스탈린화 작업은 소련권 내에 있는 모든 나라에서 의무적으로 이루어졌다. 뿐만 아니라 그의 조상(彫像)과 기념물들도 점차 사라졌다. 체코의 수도 프라하에 있던 스탈린의 유품이 얼마나 엄청났던지 체코 정부는 군대를 동원하면서까지 제거 작업을 벌여야 했을 정도였다.

이것을 스탈린 격하 운동 이라고 말한다.

스탈린 격하운동은 그 후 공산권 내의 중대한 정치적 영향을 미쳤다. 1956년에는 폴란드의 포스나니에서 반소반공 폭동이 일어난 뒤를 이어, 스탈린에 의해 숙청 감금 되었던 민족주의적 공산 주의자 고무우카가 부활, 집권하게 되었고 헝가리에서는 거족적인 반소, 반송 의리 폭동이 일어났으며 중공 소련간에는 이념 분쟁이 야기되어 중,소 대립관계가 70년대 까지 계속되게 했는가 하면 북한공산집단 내에서도 김일성의 독재와 우상화를 반대하는 연안파, 소련파의 궁중 쿠테타 음모사건(소위 반당종파 사건)이 있었다.

역사는 되풀이 된다. 스탈린을 격하시켜 인기 전술로 정권을 장악했던 흐루시쵸프도 1965년 9월 브레주네프 자신도 고르바초프 정권에 의해 격하 되었다.

북학의 김일성은 오늘날 스탈린 이상으로 자기를 신격화 시키고 있으며 결국은 봉건적인 세습왕조를 만들고자 김정일에게 정권을 넘겨줄 토대 구축에 광분하고 있지 않았던가?

그러나 김일성 부자가 죽은 뒤는 그의 대선배들인 스탈린, 흐루시쵸프, 모택동 이상으로 격하 될 것이고, 북한 동포들은 심지어 그이 시체까지 파 내어 매질하고 침 뱉어 모독할 것이 틀림없어 보인다. 왜냐하면 그들은 스탈린이나 모택동 이상으로 악독한 까닭이다.

김정일의 아들까지 3대째 세습왕조를 노리는 북한 정권은 유엔 안보리 회의에서 천안함 사태가 자신들과는 무관하다고 계속 주장하고 있다.

북한 당국은 되풀이 되는 역사의 진실을 과연 모르고 있는 것일까?

스탈린은 그가 살아있는 동안 레닌, 마르크스와 나란히 소련내 방방곡곡에서 그의 초상화와 동상, 흉상등으로 장식되었지만 오늘날 모스크바에서 그의 사진을 볼수 있는 것은 오직 제닌과 함께 찍은 1매의 사진 뿐이라고 하며 동상이나 흉상도 오직 그의 고향 그루지야의 고리시에 있는 스탈린 박물관 뿐이고 나머지는 제거 되었다는 사실을 북한측은 왜 모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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